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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명령하면, 두들겨 맞고 죽임을 당해도 따라야"플라톤의 ≪크리톤≫ 읽기
최용현 | 승인 2015.06.29 09:13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국가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애매모호하고 억울한 죄명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형이라는 최고의 중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은 사형은 소크라테스가 의도한 것이라며 그가 재판이라는 수단을 빌어 자살한 것이라고까지 평하곤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이라는 수단을 빌어 자살하였다 ?

이는 충분히 근거 있는 해석입니다. 전회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하 ≪변명≫)에서 보듯,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혐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변소하거나 배심원들의 감성에 호소하여 선처를 구하기는커녕, 변론과정에서도 모든 아테네인들이 혐오하는 기존의 자신의 행태를 멈추지 않겠다고 하고, 특유의 현란한 추궁으로 고발인들을 조롱하고, 자신에 대한 처벌은 오히려 영빈관에서의 대접이라며 배심원들을 농락하고, 배심원들과 방청객들에게 똑바로 살라며 훈계조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는 죽음이라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 스스로 ≪변명≫에서 말하듯, 그 당시 이미 70세가 넘은 노인이었고(지금으로 보면 100세가 넘은 나이일 것입니다), 내세(來世)는 위대한 현자들과 만나는 더 좋은 세상일 것이라는 종교를 가졌던(그러기에 ≪파이돈≫에서는 친구에게 빨리 죽어 뒤따라오라고 권유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 프랑스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년).

(사형평결 이후) 여러분은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여러분이 바라는 결과를 저절로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오. 왜냐하면 여러분이 보다시피 나는 이미 살 만큼 살아서 죽음에 가까이 와 있기 때문이오……죽는다는 것은 다음 둘 중 하나요. 죽음은 완전한 무와 같은 것으로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느끼지 않거나, 윤회로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주거를 옮기는 것과 같은 것이요. 그래서 그것이 만일 아무런 감각도 없어지는 일이고 꿈도 꾸지 않는 잠과 같은 것이라면 죽음이란 아주 놀랄 만큼 덕을 보는 일이고……만약 죽음이 여기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전해지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그곳에 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벌써 죽어서 여러 가지 힘든 일로부터 해방되는 편이 나를 위해 차라리 좋았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소 - 플라톤의 ≪변명≫중

비록 그가 스스로 원했던 사형평결이었다고 하더라도, 앞서와 같은 애매모호한 죄명 때문이건 그 이면에 있는 그의 평소의 反사교적 언행이나 그의 反민주적 사상과 쿠테타 가담 혐의 때문이건, 어느 모로 보나 사형평결은 그에게는 너무 억울한 처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한 죽음마저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잘못된 재판에 의한 억울한 죽임일지라도 이에 순응하여 독배를 마신 역사적 사실은 많은 후학들에게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순응,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떤 학자는 그의 이러한 죽음에 대한 순응에서 아테네인들 특유의 상무(尙武)정신과 그의 무한한 조국애를 읽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 초월한 그의 관조(觀照)적 인생관이나 윤회(輪回)적 신앙을 읽기도 하고, 어떤 학자는 그의 투철한 준법정신을 읽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후세의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죽음을 존경하여 그를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그것을 ‘비록 악법일지라도 이는 공동체의 공통의 규범이므로 이를 준수하여야 한다’(통상 이를 ‘악법도 법’이라고 표현)라는 당위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례로 제시하여 왔습니다.

위와 같은 다양한 해석들은 나름 근거가 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누구보다도 용감한 아테네의 전사(戰士)였고, (비록 조국 아테네의 민주정체에 대하여는 비판적이었지만) 조국 아테네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에 충만한 시민이었고, 윤회적 내세(來世)관을 갖고 있었던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철학자’입니다. 그것도 ≪변명≫에서 보듯, 죽음 앞에서조차 자신의 철학과 철학하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 철학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에 대한 순응도 그 자신의 ‘철학’과 연계시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유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관련된 후세들의 ‘성인’이라는 평가와 ‘악법도 법’이라는 경구의 의미와 당부도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철학과 연계시켜 해석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의 철학이 어떠하기에 그는 죽음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이렇듯 자신의 철학에 기인한 그의 순응을 ‘성인’의 자세로 해석하고, ‘악법도 법’이라는 경구로 표현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 <<크리톤>>과 <<파이돈>>,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기 직전 지인과 제자들과 대화를 나눈 것을 기록한 책으로, 그의 종교적 색채가 짙은 윤회적 내세관을 엿볼 수 있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지만

사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직접 한 적이 없습니다. 이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 사후에 저술한 ≪크리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위와 같은 억울한 죽임에 순응하는 태도를, 후학들이 위 경구로 각색하여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나중에 보겠지만 보다 정확히 각색한다면, ‘악(惡)재판도 재판’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 우리의 수많은 어용 지식인들은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비호하고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위대한 성인인 소크라테스조차자도 악법도 법이라며 스스로 이를 준수하고자 억울한 죽임마저 순순히 받아들여 독배를 마셨다는 2천 5백년전의 역사적 사실을 곧잘 이야기했습니다. 악법도 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악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고 할 것입니다.(이와 관련하여 2004년 헌법재판소도, 준법정신을 강조하기 위한 사례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예시하고 있는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대하여 교육인적자원부에 수정을 요청하며 위의 사례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을 정당화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성인이 악법도 법이다 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후학들이 각색한 것에 불과하며, 어용 지식인들이 악법을 정당화 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그의 죽음에 대한 순응을 오용한 것이라고 하니 다행인가요? 그러나 그는 ≪크리톤≫에서 충분히 그러한 취지로 받아들여질 만한 발언들을 수차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이상의 충격적인 발언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크리톤≫에서의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악법이나 억울한 재판도 준수하고 순응하여야 할 공통의 규범이라고 하는 정도를 훨씬 넘고, 후학들의 각색이나 어용지식인들의 인용을 ‘부당하고 불순하다’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순화시키고 미화시켰다’라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20쪽 정도 분량 밖에 되지 않는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는 과연 무슨 말을 하였을까요?

탈옥을 권유하는 크리톤

BC 399년 어느 새벽에, 소크라테스의 죽마고우였던 크리톤(Kriton)은 소크라테스를 찾아옵니다. 크리톤은, ≪변명≫이후 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집행만 기다리던 소크라테스를 근 1달여 동안 거의 매일 찾아와 위로를 해왔지만, 그날은 친구의 사형집행이 내일로 임박하였다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식을 알려주기 위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친구를 이대로 저 세상에 보낼 수가 없었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유합니다. 그는 훌륭한 친구를 잃지 싶지 않다, 목숨을 구할 수 있는데도 포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지금 죽는 것은 적(소크라테스 비판자들)만 이롭게 한다, 남아 있는 자녀들을 부양하여야 한다, 자신과 같은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이 돈이 아깝고 용기가 없어 재판에 소극적으로 임하였고 탈옥조차 시도하지 않았다는 대중의 평판이 두렵다, 탈옥을 하여 다른 도시로 가더라도 그곳에서 환영을 받을 것이다 라는 등의 이유를 대며 탈옥을 권유합니다.

이에 대하여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이 말하는 사유들은 탈옥 여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 여부를 결정할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항상 가장 좋은 원칙(logos) 이외에는 내게 속해 있는 다른 어느 것에도 따르지 않는 사람이었네, 그런데 지금 와서 내게 이런 운명이 닥쳤다고 내가 이전에 말한 원칙들을 내동댕이칠 수는 없지 않은가……우리는 대중들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가진 자와 진리 자체가 뭐라고 하는지 주목해야 하네……우리는 이제 이것을 생각해야 하네. 아테네인들이 나를 석방해 주지 않는데도 내가 여기서 탈옥하려는 것이 정의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일세. 그래서 만일 정의로운 것이라면 우리는 탈옥을 시도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도록 하세 

탈옥, 그것은 ‘정의’의 문제다

소크라테스는 탈옥 여부를 결정할 기준은 자신의 생명에의 위험 여부, 자신 혹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의 이익 여부, 탈옥 자체 가능 여부, 탈옥에 대한 향후의 대중의 평판 등이 아니라, 그것은 자신이 평생 사유하고 실천하였던 삶의 기준인 “정의로운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변명≫에서 보인 정의에 대한 집착과 용기의 연속입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란 무엇일까요? 그는 5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1) 결코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해서는 안된다, 2) 정의롭지 못한 일을 당하더라도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보복해선 안된다, 3) 남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4) 해를 입더라도 해로써 보복해선 안된다, 5) 타인과 합의한 것들이 정의롭다면 그것을 이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 5가지 원칙을 자신의 탈옥문제와 연계시켜 설명합니다. 그는 아테네 공동체에 거주하며 그 법률을 준수하여 왔고 그 법률에 의한 재판 절차에 따라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이제 와서 탈옥을 한다면 아테네 법률과 공동체를 무시하고 그것에 해를 입히는 것이며, 가사 재판이 잘못되었더라도(그는 자신에 대한 재판이 잘못되었다고 하였지, 근원적으로 아테네 법률 자체가 잘못되었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이유로 탈옥을 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거나 해를 주었다는 이유로 같은 방법으로 보복을 하거나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테네 법률과 공동체, 그리고 다른 시민들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는 말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위 5가지 정의의 원칙은 정의의 ‘내용’이 아니라, 정의가 주어진 이후의 ‘준수’의 원칙에 대한 문제일 뿐입니다. 물론 남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거나 보복하지 말라, 그것이 어떠한 내용이든 합의를 이행하라는 것도 정의의 한 내용이 될 수 있으나,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한 근본적 대답은 아닙니다.  

▲ 고대 아테네의 감옥.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는

그렇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근본적인 ‘정의’는 무엇일까요? 이 부분에서 그는 자신이 직접 정의를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의인화된 국가 혹은 국법을 통하여 정의를 대신 말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국가 혹은 국법을 의인화하여 탈옥 여부를 고민하는 소크라테스 자신을 힐난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는 국가의 그러한 추궁을 반박할 수 없다며 크리톤의 탈옥 제의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인화된 국가 혹은 국법이 그에게 뭐라고 말을 했을까요?

당신(소크라테스 자신)은 우리(국가 혹은 국법)에 의하여 태어나고 양육 받고 교육 받았으니 당신 조상과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도 우리의 자손이며 노예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소?……당신은 그렇게도 지혜로우면서도, 신들과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조국이 부모 혹은 조상보다도 더 영예롭고 존엄하고 성스럽고 존귀하게 여겨진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는 것이오? 그리고 부모보다 조국을 더 받들고 조국에 더 순종하며 조국이 격노할 때 이를 달래 드려야 하는 것, 조국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조국이 명령하는 것을 이행하는 것, 조국이 무언가를 지시하면 두들겨 맞건 투옥되건 잠자코 따라야 한다는 것, 조국이 당신을 전쟁터로 이끌면 당신이 부상을 당하건 죽임을 당하건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 정의로운 것은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을……그리고 부모에게 폭력을 쓰는 것도 불경한 것인데, 그런 조국에 폭력을 쓰는 것은 더욱 불경한 것이라는 점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오?

놀랍지 않나요? 나찌 이데올로기를 외치는 선동가나 쿠테타 정권과 유신헌법을 옹호하는 어용지식인들 이상이지요? 이처럼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는, 국가 혹은 국법이 시민을 태어나게 해주고 양육해주고 교육해주고 생계를 유지하게 해주었으니, 시민은 노예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목숨을 바쳐서라도) 국가 혹은 국법에 무조건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크리톤≫ 등 그 어떤 저술에서도 직접적으로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실제 그의 정의관은 그 이상으로 훨씬 충격적이지요?

성인인 소크라테스가 국가지상주의자 ?

많은 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철저한 反민주주의자였던 플라톤과 달리 민주주의 사상가였거나, 비록 민주주의에 대하여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현실(재판과정에서의 그의 변론)에서는 사상․표현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의 진정한 수호자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크리톤≫에서 등장하는 국가지상주의자로서의 소크라테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2개의 심성(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애정을 가진 소크라테스 vs 투철한 애국심을 가진 소크라테스)을 가진 모순적인 소크라테스가 있다고 주장하거나, 소크라테스 사후에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크리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비록 자신의 스승이 아테네 시민들에 의하여 처형을 당하였지만 아테네에 대한 충성심은 누구보다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변명하려는 의도에서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 관한 이러한 해석을 입증할 근거는 없습니다. 전회에 지적한 것처럼 소크라테스의 서민적 취향이나 ≪변명≫에서 보인 자신의 정의와 진리에 대한 불굴의 의지는 그의 親민중적 심성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사상․표현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의 수호자가 아니었다고, 나아가 그가 근본적으로는 사상․표현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의 억압을 주장하는 反민주적 사상가였다고 제대로 이해한다면, ≪크리톤≫에서의 그의 국가지상주의적인 관념과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 요구는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귀결로 보여집니다. 다음에서 보듯 저는 그것이 보다 적절한 추론 같습니다. 

≪크리톤≫ 자체에 모순이 존재 ?

또한 어떤 학자들은 ≪크리톤≫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정의의 5원칙들 간에도 심각한 모순이 있다고 합니다. 즉 제 1원칙(항상 정의만을 따르라는 원칙)에 따른다면, 훌륭한 시민은 어떠한 위협이나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의 정의의 원칙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이고 ≪변명≫에서의 그의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원칙들에 따르면 법령, 재판, 계약에 잘못이 있더라도(자신의 정의에 어긋나더라도)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해결 불가능한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서 보듯 ≪크리톤≫의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국가’입니다. 개인은 국가의 정의에 무조건 복종하여야 하는 객체에 불과합니다. 국가가 규정하거나 허용하는 법령, 재판, 계약이 자신의 정의나 이익에 어긋나더라도, 시민은 이에 무조건 복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크리톤≫은 이질적 돌출이거나 모순적 조합이 아니라, 오히려 사상가들의 머릿 속에만 있던 고상한 철학이 실제 현실과 맞닥트렸을 때는 언제라도 형편없는 최악의 실천을 가져 올 수도 있다는 실례를 생생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고상한 철학이라는 것이 전혀 현실적 고려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거나 지독한 反시민적․反민주적 인식에 근거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크리톤≫, 그것은 오히려 ≪국가≫의 현실이다

우리는 인류사에서 자신만이 절대 진리를 터득하였고, 자신의 진리는 너무나 우월하기에 반대자들의 도전의 허용하지 않고 반대자들의 도전을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것마저 정당화 되고, 자신들의 진리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자유와 비판은 당분간 보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혁명가들과 군사쿠테타 세력들, 그리고 그들을 지적으로 보좌한 어용 지식인들을 보아왔고, 그들의 그러한 인식과 행동이 실제 가져온 참혹한 결과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크리톤≫은 이러한 ‘독선적이고 오만한 이상 - 억압적이고 비참한 실현’이라는 인류사의 보편적 패턴의 최초의 실례일 것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그 소크라테스’는 지독한 反민주주의자입니다. 그에게 이상적인 국가는 절대권력을 가진 철인부터 아무런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한 하층민까지 위계적인 질서가 잡힌 국가였고, 그리고 그것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시민들을 이와 같은 위계질서에 맞게 교육하고 계몽하여 순치시키고, 이러한 위계질서에 반하는 사상, 문화, 유희들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의 차별과 위계의 기준을 설정하고 사상과 문화를 검열하여 통제하고 금지하는 잣대를 갖는 자는 누구일까요? ‘정의(正義, justice)’를 ‘정의(定義, definition)’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현실에서 그것은 ‘국가’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에서의 그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고상한 ‘정의(正義)’는 현실에서는 언제라도 ‘국가’의 ‘정의(定義)’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을, ≪크리톤≫이 생생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독선적이고 오만한 정의(正義)가 국가의 유일한 정의(正義)가 된다면, 역으로 그 국가의 정의(定義)하는 모든 것이 모든 이들에게 강제되어야 할 정의(正義)가 되는 길은 멀지 않습니다. 그러한 국가에서는 국가가 추구하는 이념과 목표, 국가가 관용하는 문화와 유희만 사회 내에서 허용될 것이고, 이러한 이념과 문화에 반하거나 국가의 이익을 저해하는 시민의 어떠한 행위도 용납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크리톤≫은 그런 국가에서의 시민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민은 “부모보다 조국을 더 받들고 조국에 더 순종하며”, “조국이 무언가를 지시하면 두들겨 맞건 투옥되건 잠자코 따라야 하고”, “조국이 전쟁터로 이끌면 부상을 당하건 죽임을 당하건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를 대신한 국가는 말합니다. “정의는 바로 그와 같은 것”이라고!!! 

▲ 1970년대 거리에서 장발단속 사진, 아마도 독재자는 남성의 장발과 여성의 미니스커트가 보기 싫었나 봅니다. 그의 개인적 감정마저 국가의 법과 사회정의가 되었고, 무수한 남성과 여성은 하루 아침에 사회를 문란케 하는 범법자가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자신의 덫에 걸리다

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순응도 그의 ‘철학’과 직접적으로 연계된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지독한 反민주적 철학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보듯 그의 철학의 현실적 결과에 의하면, 항상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자는 국가이고, 시민은 단순한 신민(臣民)으로서 그런 국가의 정의에 무조건적으로(자신의 정의에 어긋나거나 자신이 죽임을 당하더라도) 복종하여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자신에 대한 재판도 그러한 국가의 정의로운 행위의 하나이고, 자신도 응당 그런 신민 중 한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자가 탈옥을 할 순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지독한 反민주적 철학의 덫에 걸린 셈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위대한 성인? 물론 그의 많은 삶의 행적에서 성인의 면모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성인이라는 그에 대한 맹목적 추앙과 존경 때문에, 그의 지독한 反민주적 사상과 그로부터 결과 지워진 그의 재판과 죽음이라는 역사적 진실마저 휩쓸려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최용현  choiyh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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