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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탁월하지 않은, 그들의 '탁월함(aretē)'의 실체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읽기 (3)
최용현 | 승인 2015.08.03 08:48

이번과 다음 회에서는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이어지는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학을 다시 한번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그 밑바탕에 흐르는 反민주성을 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그들의 이상주의적 정치철학의 핵심 개념인 ‘탁월성’과 그들의 현실주의적 정치기획인 ‘과두와 민주의 혼합정체’에서 핵심 기재로 등장하는 ‘재산과 선거’에 내재된 反민주적 실체를 밝히고, 더불어 위대한 교사들이 의도한 것도 바로 그 반민주적 실체를 구현하는 것이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사들의 기본적 세계관은, 인간은 직업적·신체적 소질과 지적·윤리적 능력에서 차이가 있기에 그에 맞게 사회적 차별과 위계를 두어야 하며 오직 그 사회적 차별과 위계 속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할 때 전체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훌륭한 사회가 성립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사들의 이러한 세계관은 앞서 이야기 한 고대 전제국가의 신분(혈통과 세습)에 기초한 계급적·위계적 세계관과 유사합니다. 물론 그들이 사회적 차별과 위계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혈통과 세습에 의하여 주어지는 불변의 소여가 아니라, 각자의 소질과 능력이라는 개인적 본성이라는 점에서 고대적 세계관보다는 진보적이라고 할 수는 있습니다.

▲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가운데 등장하는 두 사람이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탁월함(arete)’, 그들 정치철학의 핵심 키워드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세계관의 연장입니다.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의 핵심에는 ‘탁월함’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 분야와 직업중 정치는 최고의 지식과 기술을 요하므로, 탁월한 지식과 기술을 갖춘 소수의 엘리트들이 정치를 전담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지배와 피지배를 정당화하거나 정치적 지위와 권리 권한을 차등 배분하는 정의의 기준으로 탁월함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건설한 국가에는 시민 중 일부의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긴 하겠지만, 나라 전체를 위해서 국내 정치와 외교를 망라하고 최선의 결과를 올릴 수 있는 방안을 짜내는 지식이 있을까? - 틀림없이 있습니다 / 그런 지식은 누구에게 있을까? - 그것은 수호자(통치자)에게 어울리는 지식인바, 지금 우리들이 완전한 수호자라고 부르는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 따라서 국가가 소질과 능력에 따라 건설되었을 경우, 가장 적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이러한 계급이 가지고 있는 지식 때문에 전체적으로 지혜가 있다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 플라톤의 ≪국가≫중

이름만 국가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국가라면 시민들의 탁월함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국가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은 모여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훌륭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따라서 그런 공동체에 가장 많이 기여하는 자가 자유와 신분에서는 같거나 더 우월하지만 정치적 탁월함에서는 더 열등한 자들보다, 또는 부에서는 더 우월하지만 탁월함에서는 뒤처지는 자들보다 국가에서 더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중

탁월함, 그럴 듯하지만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한
 
위대한 교사들의 주장대로 정치에서 탁월함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주장에는 몇가지 의구심 듭니다. 첫째 탁월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의(定意)될 수 있는 것인가? 둘째 (그것이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여 측정되고 평가될 수 있는 것인가? 셋째 그러한 탁월함을 오직 소수의 엘리트들만 터득할 수 있다는 근거는 무엇인가? 넷째 그것이 정의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한 개념이거나 현실에서 측정되고 평가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교사들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어디에서도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국정을 처리하는데 필요한 심사숙려, 신중함, 선견지명 등으로만 비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더불어 그들은 무엇이 정치적으로 탁월한 지식이고 기술인지, 그것은 어떻게 측정되고 평가될 수 있는지, 왜 그러한 지식과 기술은 소수만 가질 수 있는지도 전혀 증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정치철학의 근간인 탁월함에 대하여, 그들은 구체적으로 정의하지도 않고 아무 것도 증명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단일 주제로 가장 많은 저서를 쓴 정치학자중 한명인 로버트 달(Robert Dahl, 1915~2014)은, 이러한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에서 핵심 개념인 탁월함이 허구임을 ‘학문적으로’ 논증한 최초의 정치학자일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적 구상이 전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탁월한 도덕적이거나 도구적인 지식과 기술이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그러한 지식은 소수만이 가질 수 있다는 가정과 그런 그들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것(그렇게 해야만 훌륭한 사회가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임)이라는 믿음인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전제임을 논리적,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다음과 결론짓습니다.

▲ 국내에 번역 출간된 로버트 달의 저서들, 달은 '미국 정치학계의 좌장' '미국 정치학자들의 학장'으로 불릴 정도로 90살에 이르도록 왕성한 학문 활동을 펼쳐 민주주의, 평등, 미국헌법 등에 관한 뛰어난 저작을 다수 남겼다. 그는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에서 플라톤이래의 수호자주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완벽한 민주주의는 유토피아이고 현실적으로 민주주의 개념은 비교적 준거틀로 미비하다며 그것을 대체할 현실적 개념으로 '폴리아키'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공공의 문제들에대한 결정들은 도덕적 판단과 도구적 판단을 요구한다. 이러한 결정들은 엄밀하게 목표에 대한 것만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또한 이러한 결정들은 엄밀하게 수단에 대한 것만도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정책 엘리트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거나 어떤 것이 공동의 이익인가에 대한 우월한 지식은 갖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지적 근거는 없다.……정책 판단은 불가피하게 가치들이나 정책 목표들 사이의 교환적 선택에 대한 판단을 요구한다. 이 모든 의문들에 대해 정책 엘리트들을 신뢰할 이유를 우리는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책 엘리트들의 도덕성을 과도하게 높이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전 세계적으로 정책 엘리트들은 공동의 이익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협소한 관료적, 제도적, 조직적, 집단적 이익을 증진시키려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중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의 핵심 키워드인 탁월함은 정의될 수도 없고, 현실적으로 측정되고 평가될 수도 없고, 그것을 누가 갖고 있는지도 전혀 확인할 수 없어 지배와 피지배를 정당화하거나 정치적 지위와 권한을 차등 배분하는 정의의 기준으로 작동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위대한 교사들도 이러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탁월함의 현실적 무능, 그들도 알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위대한 교사들이 정치적 지배와 권위의 기준으로 ‘탁월함’이라는 ‘개인적 본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는, 고대의 전제국가의 지배계급과 엘리트들이 갖고 있던 ‘신분과 재산’이라는 기준보다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탁월함’(그리고 보다 광범위하게는 그들이 사회적 차별과 위계의 기준으로 제시하는 ‘소질과 능력의 차이’)이란 언제라도 ‘신분과 재산’의 함수로 전화(轉化)될 수 있습니다. 남보다 우월하거나 월등한 지식 기술 능력이란, 사실상 사회적 학습과 훈련의 결과이고, 그러한 학습과 훈련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신분)와 경제적 부(재산)의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신들의 저서 곳곳에서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앞서 보듯 ‘탁월함’이란 너무나 애매모호하여 현실적 차별과 위계의 기준으로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고, ‘신분과 재산’은 손쉽게 그러한 탁월함의 현실적 기준으로 의용(依用)될 수 있습니다. 실제 이러한 전화의 경향성과 의용의 용이성은, 그들의 정치철학이 근대가 되기까지 2천여년간 서양 고·중세의 지배적인 정치이념이 된 것처럼, 단지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실제 역사가 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현실적 전화 즉, 사회적 차별과 위계·정치적 지배의 기준으로, 이상적인 ‘소질과 능력의 차이·탁월함’에서 세속적인 ‘신분과 재산’의 차이로의 전환은, 위대한 교사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고·중세 지배계급의 도용(盜用)의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즉 위대한 교사들은 오직 개인적 본성의 차이와 탁월함이라는 철학적 차원에서의 기준을 제시하였을 뿐인데, 고·중세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고상한 철학을 신분과 재산의 현실정치학으로 왜곡하여 이용하였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진실일까요?

위대한 교사들의 시작점도 ‘신분과 재산’

그러나 이는 명백히 사실과 다릅니다. 위대한 교사들의 개인적 본성의 차이와 탁월함이라는 철학적 기준 속에는 이미 현실적인 신분과 재산이라는 현실적 기준이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즉 고·중세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의 정치철학을 도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대한 교사들은 처음부터 그러한 신분과 재산에 따른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정치철학을 시작하였다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위대한 교사들은 철학적 주제를 논하거나 이상사회를 논할 때는 이러한 ‘본성의 차이’나 ‘탁월함’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의 현실적 구현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신분과 재산’의 차이를 말하며, 이를 기준으로 사회적 정치적 위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회에 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들은 현실적 대안을 구상하며, 시민들을 신분과 재산 규모에 따라 정치적 지위와 권리 권한을 차등적으로 배분하고, 계급별 대표 할당·재산 자격 요건을 부과한 차등적 선거·정치활동에서의 귀족과 부유층에 대한 편향적 강제 등 정치를 親신분적·親재산적으로 운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정치가≫, ≪법률≫과 같은 후기 저작을 통하여 ≪국가≫의 이상사회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방법을 모색하였음을 언급하며) 플라톤은 헌정수립에 착수하게 되자, 덕성(탁월함)의 차이는 불명료하여 무용한 반면에 재산의 차이는 명확하고 유용함을 발견했음이 틀림없다……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실제적 고찰에 있어서는 덕성에 대한 하나의 대리자로서 재산에 귀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사상가는 재산이 선의 징표라는 것을 원칙적으로 믿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두 사상가 모두 부(富)가 정치적 목적에 대한 실현 가능한 최선의 접근방법을 제공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버렸다. - 세이빈과 솔슨의 ≪정치사상사≫중

위대한 교사들이 소질과 능력에 따라 사회에 차별과 위계를 부여하고, 지적·윤리적 탁월성으로 정치계급에 권위를 부여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고찰하다가, 우연히 그러한 소질·능력·탁월함이라는 기준이 불명확하다는 사실과 그러한 기준이 현실에선 親신분적·親재산적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기준의 명확성과 현실성을 위하여 ‘마지못해’ 신분과 재산을 사회적 정치적 차별과 위계의 기준으로 삼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순진한 오산입니다.

▲ 세이빈과 솔슨의 <<정치사상사1,2>>, 국내의 다수의 정치학 교수들의 논문을 역어 만든 <<서양 고중세/근대 정치사상사>>, 위 두 저술(총4권)은 서양의 여러 정치사상가들의 철학과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로 유용합니다.

‘마지못해 신분과 재산으로’,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모든 정치사상가들의 출발점은 자신들의 고귀한 이상이 아니라,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현실입니다. 혁명적 혹은 개혁적 정치사상가인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마르크스, 밀 뿐만 아니라, 버크, 하이예크와 같은 보수적 정치사상가에게도 이점은 동일합니다. 정치사상가들은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예언자들이 아니니까요.

위대한 교사들도 불만족스러운 현실에서 시작하여 그 대안으로서 자신들의 이상사회를 구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불만족스러운 현실? 그들에게 불만족스러운 현실은 당대의 민주정체였고, 그 민주정체가 모든 시민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려 할 뿐, 귀족과 부유층 그리고 그들과 물리적·정신적 친화성을 갖는 자신들과 같은 지적 엘리트들을 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위대한 교사들이 현실을 초월한 고상한 철학을 사유하다가 우연히 현실과 접목되면서 덜 바람직한 기준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바람직하지 못한 기준(그들에게는 비교적 바람직한 기준이겠지만)을 먼저 목적지의 표식으로 설정해 놓고 고상한 철학을 우회하여 왔을 뿐이라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위대한 교사들이 보다 정직하였다면, 자신들이 고상하게 말하는 ‘본성이나 탁월함의 차이’라는 문장의 각주(脚註)에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신분과 재산의 차이를 의미한다’고 명기해 놓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은 고·중세 지배계급의 신분적·위계적 사회체제와 정치질서에 ‘철학’이라는 휘장을 둘러주었을 뿐이고, 오히려 그들의 정치철학이 2천여년 동안 지배적 정치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 정치철학에 ‘내재되고 의도된’ 이러한 신분과 재산에 기초한 계급적(反민주적) 본질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발가벗은 ‘탁월함’은 탁월하기는커녕 추잡하고 불순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탁월함’으로의 포장은 탁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에 내재되고 의도된 신분과 재산에 기초한 계급성과 反민주성이, 오히려 그들의 정치고전을 끈임없이 다시 읽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그들의 정치고전은 시중서점이나 도서관이 아닌 단지 유물로써 박물관에나 전시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체제의 진정한 강점은 지배계급의 폭력이나 강제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들이 지배자들의 세계와 정치에 대한 관념을 수용함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지배계급의 세계관, 정치철학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정치적 선언이나 법과 제도의 운영이, 피지배계급의 동의에 기반 한 것으로 보여 지고, 피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보여 지고, 종국에 피지배계급을 포함한 모두의 상식이 될 때(그람시는 이를 ‘헤게모니적 지배’라고 함) 진정한 지배가 달성된다는 것입니다. 지배의 본질이 이러하다면, 정치 혹은 권력적 기예(technique)의 진수는, 지배계급이 가진 폭력이나 강제력의 정도가 아니라,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의도와 이익을 피지배계급이 수용할 만큼 심오한 철학과 그럴듯한 상식으로 얼마나 잘 포장하고 가장(假裝)하였느냐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대중들이 과두적·反민주적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고 복잡한 혼합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지배의 속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 안토니오 그람시, 대학시절 최장집 교수의 강의를 통하여 그람시를 알게 되었고, 그의 사회변혁 이론과 헤게모니 개념에 매료되어, 국내에서 출간된 그에 관한 거의 모든 책들을 사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고전은 계급적·反민주적 본질을 포장하고 가장하는 인류 최초의 철학적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심오하고 난해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상식적이고 그럴듯하게 말입니다. 그들의 정치철학의 핵심 키워드인 ‘탁월함’은 그만큼 탁월한 포장이고 가장이었습니다.

이것은 2천년 후 새로이 등장한  근대의 지배계급에게도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근대는 위대한 교사들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은 근대에도 그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아니 생명력을 유지하는 수준을 넘어 다음 회에 보듯 근대의 지배계급은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에 따라 근대정치를 주조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근대 정치의 근간에는 2천년 전의 위대한 교사들의 정치철학이 있습니다. 

최용현  choiyh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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