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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이씨의 사당인 이강영당(理江影堂)
황경수 | 승인 2020.03.23 09:08

이강영당(理江影堂)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후곡리 산9-1, 14-4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2015년 4월 17일 청주시 향토유적 43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형조판서(刑曹判書) 해고(海皐) 이광정(李光庭, 1552∼1629)과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우당(二憂堂) 이만원(李萬元, 1651∼1708)의 영정을 봉안한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사당이다.

이강영당은 원래 후곡리의 후곡 마을에 있었으나 1980년에 대청댐 공사로 영당이 수몰되게 되자 지금의 탄현 마을로 옮기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말정일(末丁日)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지금의 영당은 1980년에 다시 지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대청에 분합문을 달고 좌우에 3칸의 온돌방과 1칸 반의 부엌을 앞으로 배치한 홑처마의 목조 기와집이다. 솟을대문 안의 건물은 ㄷ자형으로 영당 정면에 ‘이강영당(理江影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이광정(李光庭)의 영정은 관복을 입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가로 99cm, 세로 164cm의 먹으로 바탕을 그린 다음 색을 입힌 그림이다. 배면(背面)에 적힌 화상기(畵傷記)를 통하여 1609년(광해군1)에 인목대비(仁穆大妃) 책봉의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원승광(袁承光)이 그린 57세 상(像)임을 알 수 있다.

이만원(李萬元)의 영정은 관복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으로 가로 85cm, 세로 166cm의 설채(設彩) 견본(絹本)이다. 지금의 영정은 1729년(정조16)에 매선당(每善堂)이 다시 그린 것으로서 대전에 사는 증손인 이상희(李尙熙) 선생이 보관하고 있다.

*이광정(李光庭, 1552∼1629)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덕휘(德輝), 호는 해고(海皐)이다. 부사(府使) 이말(李煞)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군수(郡守) 이경종(李慶宗)이다. 아버지는 정언(正言) 이주(李澍)이며, 어머니는 유사필(柳師弼)의 딸이다.

1573년(선조6) 진사시에 합격했다. 1590년 교관(敎官)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승문원정자·사관(史官)·시강원설서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에 선조를 모시고 가서 정언과 지제교(知製敎), 예조·병조의 좌랑을 지냈다. 이듬해 환도 후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을 도와 실무를 담당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의 부사였던 심유경(沈惟敬)을 만나러 갔다. 명나라에서 돌아와 호조참판이 되어 군향(軍餉)을 정리하여 바로잡는 데 힘썼다. 1599년 호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한성부윤이 되었다. 1601년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602년 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때 주청사(奏請使)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책봉에 대한 고명(誥命)을 받으러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계되었다. 1604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어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다. 뒤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이 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호조판서로 제수되었으나, 당시의 정치상황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공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626년(인조4)에는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 때 그곳의 인심이 매우 이익을 탐하여 이를 개혁하는 일을 단행하다가 마찰이 생겨 해직당하고, 기로소(耆老所)로 들어갔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을 당해 왕을 강화도로 모시고 피난하는 공을 세웠으며, 1629년(인조7) 강화도에 있었을 때 걸린 전염병이 악화되어 운명하였다.

*이만원(李萬元, 1651∼1708)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춘(伯春), 호는 이우당(二憂堂)이다. 이현(李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성징(李星徵)이다. 아버지는 이형(李泂)이며, 어머니는 최대년(崔大年)의 딸이다.

1678년(숙종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에 지평(持平)이 되어 송시열(宋時烈), 윤증(尹拯)의 시비를 분별할 것을 상소하자 왕이 가납하였으며, 홍문록(弘文錄)에도 올랐다.

1693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고, 2년 후에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97년 성주목사가 되어 혜정(惠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들었다. 1700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서 공조참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연릉군(延陵君)에 봉하여졌다. 1796년(정조20)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공주의 부용당(芙蓉堂) 영당(影堂)에 제향되었다.

≪청주대 교수 겸 청주학연구원 책임연구위원≫

황경수  hksu2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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