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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의 별<오늘을 생각하며>
김영회 | 승인 2015.12.03 13:55

밤하늘의 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던 김영삼.
그는 군사 독재와 맞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온 몸을 불살라 싸웠다

 

호사유피(虎死留皮) 인사유명(人死留名)이라 했습니다.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중국의 고사(故事)에 나오는 말입니다.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천수(天壽)를 다하고 영면(永眠)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떠나던 날은 첫 눈마저 흩날려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했습니다.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나자 많은 국민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생전 군사독재와 싸우던 그의 용기 있는 삶을 칭송했습니다.

‘大道無門’(대도무문)’이 그의 좌우명이었습니다. 큰길에는 문이 없다는 이 네 글자는 바르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정치철학이었습니다. 그는 그 철학대로 인생을 살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불의와 싸워 대통령의 자리에 오름으로써 필생(畢生)의 대망(大望)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중학시절 책상 앞에 ‘미래의 대통령’이라는 표어를 써 붙이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가 처음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의 비서가 되면서 부터입니다. 장택상이 선거에 출마해 연설을 하는 학교 운동장 연단에서 마이크를 높이 쳐들고 쪼그려 앉은 앳된 모습의 빛바랜 사진 한 장이 그가 정치 초년생이 된 것임을 보여주는 ‘인증 샷’입니다. 

1954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고향 거제에서 3대 민의원에 당선 되면서 그의 정치 역정은 시작됩니다. 그의 나이 26세 당선은 한국 의정사의 최연소 기록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될 때 까지 9선을 기록합니다.

그는 신민당 원내총무 시절 정보기관원의 초산테러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유신독재철폐운동을 계속하다 1979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고 그것이 발단이 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시위가 일어나 급기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시해(弑害)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는 전두환 정권 아래서 두 차례의 가택연금을 당했고 83년 5월, 23일간의 생사를 넘나드는 기록적인 단식을 통해 전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립니다. 이때 그가 한 말이 바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은 동지이자 라이벌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군사독재와는 함께 싸웠고 당내 경쟁에서는 서로 겨뤘습니다. 

70, 80년대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은 민주화 투쟁에서는 손을 잡은 동지였으나 당내 경쟁에서는 언제고 라이벌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안팎으로 싸우면서 그때마다 각자의 입지를 넓혔고 정치적으로 주가를 올렸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아우먼저, 형님먼저’로 잇달아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둘이 똑같이 ‘천추의 한’을 풀었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은 많이 달랐습니다. 김영삼이 늘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가하면 김대중은 거의 무표정한 얼굴이었습니다. 김영삼이 ‘좌동영(左東英) 우형우(右炯宇)라고 항상 왁자지껄 사람들을 몰고 다녔는가 하면 김대중은 몇 권의 책을 옆에 들고 사색하듯 혼자 걸어가는 모습을 보이곤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 상대를 깔보았다고 합니다. 김영삼은 김대중을 “대학을 안 나왔다”고 깔보았고 김대중은 김영삼을 “머리에 든 게 없다”고 무시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뭐, ‘도긴개긴’인 셈인데 두 사람은 그렇게 동지이자 라이벌로 공존했던 것입니다.

1995년1월 중부매일 창사 5주년을 맞아 청와대에서 김영삼대통령과 특별 회견을 하고 있는 필자(왼쪽).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세상은 몰라보게 바뀝니다. 당장 특수차량만 통행하던 청와대 앞길은 택시들이 오고가는 시민의 길이 됐고 저녁이면 연예인들을 불러 술판을 벌이던 ‘안가(安家)’라는 이름의 음습한 비밀가옥들은 중장비가 동원돼 철거됐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가 주축이 돼 비밀리에 운영돼 온 말썽 많던 ‘하나회’는 전격 해체됐습니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묵인 아래 군의 요직을 독점해 온 골칫덩어리였습니다.

청와대에 칼국수가 등장한 것도 이때입니다. 취임 1주일 만에 출입기자들과의 오찬에 칼국수가 나왔고 그 자리에서 “나는 앞으로 단돈 천원도 받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금융실명제 실시와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를 발표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청와대 개관이래 출입기자들이 가장 바빴던 때가 그 시기였습니다. 그동안 가짜 민주주의에 속아 온 국민들은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구나”하고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실감했습니다.

김영삼, 그는 사람을 좋아했고 아꼈습니다. 그가 발탁한 사람은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노무현, 이명박 두 전 대통령 말고도 이회창 이인제 홍준표 이재오 김문수 김무성 손학규 서청원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두 김영삼이 발탁해 정계에 입문한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언론계에는 ‘김영삼 장학생’이라는 기자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그에게도 공(功)과 과(過)가 있습니다. 그의 가장 큰 공은 30여년을 한결같이 반독재 투쟁을 벌여 민주화를 이루어 낸 것이요,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일 것입니다. 과라면 아무래도 IMF위기를 들 수 있겠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한다”던 민정, 민주, 공화 3당 합당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의 약속을 저버린 측근들의 비리도 흠이었습니다.

또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1994년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중재로 합의된 남북정상회담이 김일성의 급서(急逝)로 불발이 된 것이 매우 섭섭했을 것입니다.

그는 죽어서 더 빛이 나는 사람입니다. 살아서도 국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죽어서는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이런 대통령은 없었습니다.

평소 서예를 좋아 하던 그는 ‘統合 和合’(통합 화합)이라는 휘호를 남겼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시의적절한 글귀입니다. 사분오열(四分五裂)로 갈릴 대로 갈린 국론,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기에 말입니다.

남북이 갈리고, 동서가 갈리고, 진보와 보수가 갈리고, 여당은 여당끼리, 야당은 야당끼리 갈려 다투는 우리의 현실이 그는 몹시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영삼 정신’의 완성은 궁극적으로 국론의 통합, 남북의 통합이 아닐까 싶습니다.

생전 그는 포용하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후보시절 “독재자의 딸”이라며 “칠푼이”라고 했던 독설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 일면입니다.

김영삼. 그는 이제 죽어서 더욱 빛나는 어두운  밤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김영회  yhk9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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