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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선언≫을 읽으면 '헬조선'이 보인다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읽기 (2)
최용현 | 승인 2016.03.21 09:22

마르크스에 의하면, 고대 노예제는 중세 봉건제를 낳았고, 중세 봉건제는 다시 근대 자본주의를 낳았습니다. ‘낳았다’는 것은 기존의 생산양식 속에서 새로운 생산양식의 토대가 잉태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토대는 기존의 생산양식 하에서 생산력의 성장을 주도하고, 그 성장이 일정한 발전단계에 이르면 기존의 생산관계나 소유관계는 생산력의 성장을 촉진시키기는커녕 그 성장을 저해하는 질곡으로 변하게 되고, 종국에 기존의 생산․소유관계는 분쇄되고 그 생산력의 성장에 맞는 새로운 생산․소유관계가 정립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모두 계급과 소유가 존재하는 사회라는 점에서 공통됩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는 계급과 소유가 사라진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계급과 소유의 역사를 전사(前史)로 만들고, 계급과 소유가 없는 전혀 새로운 인류의 후사(後史)를 만들 만한, 기존의 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와는 다른 자본주의만의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요? 지금의 자본주의 속에 잉태 혹은 내재되어 있는 전혀 새로운 사회인 공산주의를 위한 토대는 무엇일까요?

자본주의는 전혀 새로운 新 인류사를 잉태하였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여러 쪽을 할애하여 자본주의의 놀라운 생산력 발전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공산당 선언≫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찬사로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있는 책은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18세기 중반 영국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는 공업과 상업, 교통과 통신, 기술과 과학 등에서 전대미문의 놀라운 성취를 달성하였고, 자본주의의 문화와 문명은 사회와 非문명 세계 곳곳에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모든 부문의 전일적 지배체제가 되었습니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활동이 무엇을 이룩할 수 있는가를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부르주아지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수로, 고딕식 성당과는 완전히 다른 기적을 이루었으며, 과거의 모든 민족 대이동이나 십자군과는 전혀 다른 원정을 수행하였다……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을 이용하여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새로운 공업은 이제는 현지의 원료가 아닌, 아주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가져온 원료를 가공하며, 그렇게 하여 생산된 제품은 자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소비 된다……부르주아지는 백년도 채 못 되는 지배 기간에 과거의 모든 세대가 만들어낸 것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고 더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어냈다. 자연력의 정복, 기계장치, 공업 및 농업에서의 화학의 응용, 기선, 철도, 전신, 세계 각지의 개간, 운하의 건설, 마치 땅 밑에서 솟아난 듯한 방대한 인구, 이와 같은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의 태에서 잠자고 있었다는 것을 과거의 어느 세기에 예감이나 할 수 있었으랴!

마르크스의 말처럼, 원료의 자급자족적 확보․노동력의 가내 충원․소규모의 지역적 교역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산과 소비는 사회 전반과 식민지와 교역국으로 확대되어 전체 사회와 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계를 맺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특징을 ‘생산(혹은 생산과정)의 사회화’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러한 생산의 사회화는 부르주아지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모순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자본주의하에서 놀랍도록 사회화되어 발전을 거듭하는 생산력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혹은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와 모순을 일으키고, 그러한 생산․소유관계가 이제는 생산력의 발전에 질곡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가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소유, 계급, 착취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에서 계급은 크게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지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로 나누어집니다. 생산에 필요한 기계와 도구를 소유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생계를 위하여 유일하게 자신이 갖고 있는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고, 부르주아지는 구매한 노동력을 자신이 소유한 생산수단에 투여하여 상품을 생산합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지불 받은 노동력의 댓가(임금) 이상의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자본가는 생산수단을 독점한 것을 빌미로 그러한 잉여가치를 착취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르크스에게서 계급이나 착취는 경제적․구조적인 개념입니다. 그에게 계급은 재산이나 소득의 많고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에서 각자가 차지하는 지위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였느냐 그렇지 못하여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느냐에 따른 개념입니다. 착취는 그러한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의하여 생산과정에서 구조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에게 착취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것처럼 개인의 도덕적․선택적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처럼 계급과 착취의 문제를 생산과정과 연계시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마르크스의 독창적인 인식이며, 나중에 보겠지만 바로 이점이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를, 수많은 여타 사회주의자들이나 유사 마르크스주의들과 구별시켜 주는 점입니다. 그들은 대체로 자본주의의 불평등과 착취는 분배과정의 조정이나 도덕적 실천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보는데 반하여, 마르크스에 의하면 이러한 계급과 착취의 종식은 오직 그것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생산과정의 전복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파괴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근대의 공장.

생산 사회화와 생산수단 독점의 모순

자본주의하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모순을 일으키는 것, 자본주의적 생산․소유관계가 더 이상 생산력의 성장을 촉진시키기는커녕 그 성장을 저해하는 질곡으로 변하게 된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러한 대표적 예로 ‘공황’을 들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놀라운 생산력은 이전 시대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과잉생산이라는 문제를 야기하고, 무한경쟁 속에서 이윤이나 이자를 얻어야만 하는 부르주아지는 더 이상의 생산은 손해의 누적만 의미하므로, 생산 감축․노동자 해고 등 생산력 감퇴로 내몰린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전체 부르주아 사회의 존립을 더욱 더 위협하고 있는 상업공황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공황시에는 제조된 생산물뿐만 아니라 이미 이룩된 생산력의 상당 부분도 주기적으로 파괴된다. 공황시에는 이전의 모든 시대에는 터무니없어 보였던 과잉생산이라는 전염병이 만연하게 된다……그것은 사회가 너무 많은 문명, 너무 많은 생활수단, 너무 큰 공업과 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생산력은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발전에 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산력은 소유관계에 비하여 너무 방대해져서 부르주아적 소유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억제하게 된다. 그리고 생산력이 이 질곡을 극복하기 시작하면 부르주아 사회 전체를 혼란상태에 빠뜨려버리며, 부르주아적 소유의 존립자체를 위태롭게 한다. 부르주아적 관계는 자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부를 포용하기에는 너무도 협소해진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어떻게 공황을 극복하는가? 한편으로 거대한 생산력을 어쩔 수 없이 파괴함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장을 확대하고 기존의 시장을 보다 철저히 착취함으로써 공황을 극복한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는가? 보다 더 광범위하고 파괴적인 공황을 준비하게 되며, 공환을 예방할 수단도 감소시키게 된다.

그의 예언이 맞든 틀리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이외에, 자본주의는 미래의 공산주의를 가능케 하는 토대를 잉태하고 성장시키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자본주의하에서 잉태되고 성장되고 있는 공산주의적 토대가 무엇일까요?

“자본주의는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다”

마르크스는 위와 같은 자본주의의 놀라운 ‘생산력의 성장’과 ‘생산(과정)의 사회화’가 공산주의의 기반이 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전제로 하기에, 이러한 자본주의의 놀라운 발전이 반드시 선행 되어야 하고, 고립과 투쟁이 아닌 공산주의적 연대와 공유 의식은 생산의 사회화를 통한 물질적․구조적 상호 연계가 전제되어야만 성취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성장과 생산의 사회화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모든 역사적 성취는 이런 외부적․환경적 요인의 변화로만 달성될 수는 없지요. 거기에는 반드시 인간의 의지와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위한 물적 토대이외에 인적 토대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 잉태되고 성장되는 또 하나의 공산주의적 토대를 제시합니다.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와 교환관계, 부르주아적 소유관계,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마치 마술이라도 부린 듯이 그토록 엄청난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을 만들어 냈지만, 자기가 주문으로 불러낸 저승사자의 힘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마법사와 같다. 지난 수십년 동안 공업과 상업의 역사는 현대적 생산력이 현대적 생산관계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존립과 지배의 조건인 현대적 소유관계에 대한 저항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그런데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올 무기들을 벼려냈을 뿐만 아니라, 이 무기를 자신에게 겨눌 사람들, 즉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현대의 노동자들도 만들어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진전될수록, 생산력(자본)의 증대함에 따라 노동자계급은 점점 더 증대될 것이고, 그러한 노동자계급은 분업과 기계의 활용으로 노동자계급내의 차이는 점점 사라져 동질화 되고, 대규모 공장제도로 거대한 집단으로 조직화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증대되고 집적되고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은 처음에는 개인적․산발적 투쟁에 매몰되지만, 점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의 자신의 계급적 지위와 착취관계를 터득하게 되어, 서로 연대하여 경제적․정치적인 계급투쟁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여러 발전 단계를 거친다.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가, 다음에는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또 그 다음에는 한 지역에 있는 같은 부문의 노동자들이 그들을 직접 착취하는 부르주아 개개인에 대항하여 투쟁한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도구 자체를 공격한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과 경쟁하는 외국 상품을 파괴하고, 기계를 박살내며, 공장을 불태움으로써 몰락해버린 중세 노동자의 지위를 폭력으로 되찾을려 한다. 이 단계의 노동자들은 전국에 산재하여, 상호간의 경쟁으로 갈라진, 분열된 대중일 뿐이다……그러나 공업의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숫자만 증가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보다 거대한 집단으로 뭉쳐 성장하며, 점차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게 된다 ……개별적인 노동자와 개별적인 부르주아 사이의 충돌은 점차 더 두 계급간의 충돌의 양상을 띠게 된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에 대항하여 결사체(노동조합)를 조직하기 시작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임금 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뭉친다……투쟁의 진정한 성과는 일시적인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노동자들의 단결이 확대되는데 있다……이러한 연계에서 동일한 성격을 띠는 수많은 지역적 투쟁이 하나의 전국적 투쟁, 즉 계급투쟁으로 집중된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프롤레타리아들이 이처럼 하나의 계급으로, 나아가 하나의 정당으로 조직되는 일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쟁으로 말미암아 끈임없이 파괴된다. 그러나 이 일은 새롭게 다시 일어나며, 그때마다 더욱 강해지고, 더욱 견고해지고, 더욱 위력적인 것이 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은 경제적․정치적 투쟁은 때때로 승리하기도 하고 때때로 패배하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최종적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권력을 획득한 새로운 사회는, 기존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계급과 소유가 사라진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하는 세상은 계급과 소유가 사라질까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아무런 소유도 갖지 아니한 계급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전의 모든 지배계급들은 지배권력을 장악한 후, 사회 전반을 자신의 전유(專有) 조건 아래 종속시킴으로써 이미 획득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하지만 프롤레아타리아는 자기 자신이 속해 있던 기존의 전유양식을 폐지하고, 나아가 지금가지 존재한 다른 모든 전유양식을 폐지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력을 장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는 보호하고 강화할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명은 지금까지 사적 소유를 보호하고 보장해 온 일체의 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어느 특정한 때 혹은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붕괴될 것이라고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150여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예언은 명백히 틀렸습니다.

마르크스 사후 자본주의는 수차의 공황에 내몰렸고 그 공황으로 인하여 세계전쟁까지 치뤘지만, 자본주의는 붕괴되기는커녕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또한 마르크스는 자본의 발전에 따라 그리고 농민 등 중간계급이 지속적으로 몰락함에 따라 노동자계급이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경쟁과 착취의 강화로 인하여 노동자계급은 더욱 궁핍화될 것이라고 예견하였지만, 그의 이러한 노동계급의 단일화․궁핍화 테제는 현실에서 끈임 없이 의문시 되었습니다. 더욱이 지난 세기말에는 역으로 현실 사회주의가 사망을 선고받았고, 후쿠야마와 같은 이는 자본주의는 종국적 승리자임을 당당히 선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1848년 6월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바리케이트 투쟁.

마르크스의 예언은 틀렸다!?

그러나 비록 마르크스의 예언이 틀렸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종국적 승리자일지라도, 그의 비판 정신만큼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자본주의가 종국적으로 승리하는 시점을 전후하여 전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태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입니다.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 정권에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전세계에 기업과 시장의 중시, 노동 유연화(노동자 해고의 자유), 노동권익과 서민복지 축소, 공적 영역의 사영(私營)화, 정부규제 완화 등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요? 은행과 투자업체는 투자할 돈이 남아돌고 기업은 원료․소재․자동화․정보 기술 등의 발전으로 생산여력이 남아도는데, 세계의 많은 인구들은 여전히 굶주림에 허덕이고 사회의 불평등 지수는 점점 나빠지고, 수많은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절망하고 노동자들은 실업의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200여년 전의 천박한 자본주의로 회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요?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성장은 그 규모와 속도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공산당 선언≫에서의 찬사는 대한민국의 자본주의에 주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삼성․현대․엘지․한화 등은 정권의 비호, 극악의 노동수탈, 각종 불법과 특혜를 통하여 막대한 사적 재산을 축적하고 극소의 지분만으로 전체 기업집단에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재벌체제를 구축하여 왔습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열풍이 닥친 이후는 어떠한가요? 재벌들은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하자, 내부하청․일감몰아주기․골목상권진출 등 이제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안정적 수익창출만을 도모하고, 노동자 해고․비정규직 확대․정년 축소․사업축소․투자유보 등으로 생산설비를 축소하고 노동자의 지위와 서민의 생계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과 가난한 서민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헬조선’이지만, 가진 자들에게는 모두의 곶감을 빼먹으며 노동자와 서민들을 마음대로 희롱할 수 있는 ‘갑질천국’입니다.

지금의 세계적인 장기불황과 미취업․실업 증대가 모든 생산자원을 소진하여 더 생산할 여력이 없어서 일까요? 아니면 모두의 욕구가 충족되어 더 생산할 이유가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더 이상 일하고 싶은 노동자들이 없어서일까요? 지금의 자본주의는 5-60년대의 자본주의보다 몇 십배의 생산능력을 지녔습니다. 길거리에는 일하고 싶은 청년, 실업자, 퇴직자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하였고 더욱 발전할 여지가 있음에도, 한편으로는 투자와 생산설비는 유휴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취업자와 실업자는 넘쳐납니다.

왜 이런 황당한 코미디 같은 상황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지금의 자본주의는 생산능력이 넘쳐나고 사람들의 욕구도 여전히 높고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넘쳐나는데, 왜 이를 활용하지 않을까요? 국가권력자와 자본권력자들은 세계적인 무한경쟁 때문에 그렇다, 세계경제가 모두 불황에 빠졌기 때문에 그렇다, 생산과정에서의 기술과 과학의 진보 때문에 그렇다, 노동계급이 변화적응성이 부족해서 그렇다고들 합니다.

박근혜 정권은 경제민주화, 고용확대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이 정권 들어서 청년실업과 전체실업률은 갈수록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이글을 쓴 3월 17일자 신문)

지금의 자본주의가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더 이상의 생산이 극소수의 산업․금융자본가들의 이익과 지배력의 유지와 확대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가계급의 이익과 지배력이라는 한계가 없다면, 생산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많은 욕구가 충족될 것이고 일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되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질곡으로 작용하는 상황입니다.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유일한 진리로 받아 들여졌음에도, 오히려 모두들 미취업과 실업의 공포에 허덕이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최악으로 치닫는 바로 지금,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본주의가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한 계급을 억압하자면 억압받는 계급에 최소한의 노예적 생존이라도 유지할 만큼의 조건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농노제 아래 있던 농노는 도시공동체의 성원으로 올라섰으며, 봉건적 절대주의의 속박하에 있던 소부르주아는 어렵게나마 부르주아로 상승해갔다. 그런데 현대의 노동자는 공업의 진보와 함께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급적 생존 조건 아래로 깊이 가라앉고 있다. 노동자는 빈민이 되고, 빈궁은 인구와 부의 증가보다 더 빠르게 늘어난다. 이제 여기에서 부르주아지는 더는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자기 계급의 생활조건을 규제적인 법률로도 더는 사회에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부르주아지는 사회를 지배할 능력이 없는 이유는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노예들에게 노예적 생활조차 보장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사회는 이제 부르주아지의 지배 아래에서 살아갈 수 없다. 달리 말해 부르주아지의 존재는 이제 사회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최용현  choiyh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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