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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 마르크스주의의 맨 얼굴?베른슈타인의 ≪전제/과제≫와 로자의 ≪개혁/혁명≫읽기 (4)
최용현 | 승인 2016.05.23 09:04

마르크스주의는 민주적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민주주의를 보는 시각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입헌주의, 시민의 자유, 언론의 자유, 보통선거권, 대의 정부, 권력분립, 경쟁적 정당체계...... 우리는 어떠한 국가가 민주적이냐 비민주적이냐를 따질 때, 이러한 원리와 제도가 실제로 실시되고 있느냐를 확인합니다.

이러한 원리와 제도들은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자유주의적․절차적 기본 전제들입니다. 이러한 전제들에서 바라본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실천적으로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흔히 현대의 우리가 민주주의의 기본적 전제라고 알고 있는 이러한 원리와 제도에 대하여 마르크스와 그의 후예들은 한편으로 비웃고 한편으로 무관심했습니다. 20세기 전반기의 마르크스주의자중 이에 대한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바로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일 것입니다.

베른슈타인.

마르크스주의는 反민주적일까?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는 反민주적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모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독특한 시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은 현대의 우리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정치체제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갖든, 기본적으로 계급적 본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경찰, 군대와 같은 강권적 국가기구는 물론 의회제, 관료제, 자유, 평등 등의 제도와 이념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계급 구조에 초연한 ‘중립적’ 기구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이해를 대변하고 자본주의적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계급적’ 도구라고 보았습니다.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는 물질적․경제적 토대의 계급적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마르크스가 프랑스 혁명사 3부작과 같은 정치적 저작에서 국가와 정치의 ‘상대적 자율성’을 시사하기도 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맞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자율성이 국가와 정치의 계급적 중립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보나파르트 체제나 20세기 나찌 체제처럼 정치인과 관료들은 때로는 부르주아들의 현재적 이익을 무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부르주아들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조직적․제도적 이익을 우선시하기도 하지만(‘자율적’), 부르주아 전체의 그리고 장기적인 이익과 자본주의 질서의 수호라는 근본적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상대적’)는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현실의 ‘민주주의’를 보는 시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마르크스는 강권적․독재적 체제보다는 오히려 계급적이되 외형적으로 非계급적으로 보이는 민주주의 체제가 계급지배에 더욱 효과적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는 민주주의마저도 계급지배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하여 이를 거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현실의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힘을 보여주고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선전할 수 있는 중요한 마당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와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은 현실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지배를 관철하는 효과적인 도구이지만 그 ‘마지막’ 형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마르크스나 로자, 레닌과 같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反민주적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민주주의가 계급적 본성과 한계를 벗어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현실의 민주주의를 기초지우고 한계지우고 있는 토대가 되는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전복하여 모두가 모든 영역에서 평등한 사회를 이룩할 때 이상적인 민주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마르크스주의는 反민주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닌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최대의 수정

이론적․실천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레닌, 모택동, 그람씨 등 주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수정주의자입니다. 이들의 새로운 이론적․실천적 모색은 본래 마르크스 자신에게 없던 내용이었거나 심지어 그가 생전에 지독히 반대하던 것들이었으니까요. 이는 명백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수정임에도 이상하게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베른슈타인과 달리 그들을 수정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수정주의라는 말 자체의 부정적인 역사적 연원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을 꼽으라고 하면, 레닌주의의 등장과 이에 기초한 러시아 혁명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최대의 이론적․실천적 수정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레닌주의의 중대한 수정 중의 하나는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민주주의적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레닌 이전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성숙과 노동계급의 계급의식 성취라는 객관적․주관적 조건이 모두 무르익었을 때에만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중 한명이었던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레닌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객관적․경제적 조건이 무르익거나 노동계급의 의식이 완전히 성장했을 때만 혁명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레닌은 그 대신 탁월한 능력을 가진 혁명가들의 조직이 혁명적 변화를 추동할 수 있다고 보고, 그러한 혁명가들의 조직은 비교적 소규모로 보안과 비밀이 철저히 유지되는 군대적 규율과 복종이 준수되는 전문적인 직업 혁명가 집단(이들은 노동계급의 전위前衛라고 함)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레닌은 이러한 자신의 혁명이론의 추종자들만으로 볼셰비키당을 만들었고, 1917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10월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쟁취 하였습니다.

물론 레닌 자신이 자신의 전위당 혁명이론을 당시의 저발전되고 전제적이었던 러시아적 특수성을 반영한 과도기적․상황적 혁명이론으로 구상했던 것인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일반적 혁명이론을 창안하려고 한 것인지 다툼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그 이후의 모택동 등 非유럽권 혁명가들의 추종으로, 결과적으로 그는 마르크스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변혁이론의 정립자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레닌의 이러한 전위당 개념은 혁명이후에도 지속됩니다. 물론 이러한 전위당 관념의 지속에는 국제적 고립, 내전, 경제적 궁핍과 혼란 등 혁명직후의 러시아의 어려움이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수호하고 사회주의로의 일관된 지향을 위해서는 볼셰비키들의 독재가 필요함을 경험적으로 터득하였고, 레닌은 혁명직후 볼셰비키가 다수당이 되지 못하자 민주적으로 선출된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이후 부르주아 정당과 정치인들은 물론 같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경쟁적 정치세력인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을 정치과정에서 축출해버렸습니다. 스탈린의 공산당 일당 독재는 레닌의 이러한 조치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레닌과 스탈린.

민주주의, 마르크스주의 vs 레닌주의

마르크스와 레닌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비록 혁명을 주장하였지만, 혁명의 전과정을 항상 ‘민주주의’와 연계시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베른슈타인과 같은 개혁적 사회주의자이든 로자와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자이든, 제도적 방법(선거)에 의하든 非제도적 방법(혁명)에 의하든, 기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권 쟁취와 혁명 이후의 사회주의적 지향 과정 모두에서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와 지지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성숙을 통하여 노동계급이 사회의 절대 다수가 되고 그들이 의식화되어 사회주의 체제를 스스로 희망할 때 사회주의를 이룩할 수 있고, 그 과정의 주체는 노동계급이어야 하고 사회주의 정당은 그러한 과정에서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프롤레타리아트를 상대로 혁명의 필요성을 선전․선동하고 사회주의를 교육․계몽하는 역할)일 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소수의 혁명가나 사회주의 정당이 다가올 혁명을 대신할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도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라 혁명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체제를 수립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독재는 ≪공산당 선언≫읽기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사실상 독재가 아니라 절대다수 대중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도하는 민주정체를 지칭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듯 비록 혁명 이후의 정권에의 참여 범위와 방식 등에 대하여 다소간의 다툼이 있었지만(부르주아나 지주의 정치참여권을 얼마동안 그리고 어느 범위까지 제한을 할 것인가 여부, 기존의 의회제 방식을 지속할 것인가 자치제로 전환할 것인가 여부 등), 대중 혹은 노동계급을 대신한 엘리트나 정당의 일인․일당 통치를 상상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레닌의 혁명이론과 혁명정부의 反민주성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사람이 레닌과 같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로자였습니다. 로자는 사회주의 운동은 대중의 참여와 지지에 의지하는 운동인데 반하여 소수의 직업혁명가들의 음모에 의존하는 레닌의 전위당 이론은 자코뱅․블랑키적이라고 비판하고, 이러한 레닌의 당 조직은 종국에 反민주주적․권위주의적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에도 볼셰비키 혁명정부가 직면한 여러 곤란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도 하였지만, 그들의 계속된 언론 탄압, 의회와 정당 해산 등의 反민주적 조치에 대하여 비판하였습니다.

로자는 레닌과 달리 혁명과정과 혁명이후에서 민주주의적 계기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앞서 보았듯이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한 일탈에 불과한 것일까요? 마르크스나 로자의 혁명이론은 레닌적․러시아적 실패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요? 그들의 혁명이론 대로 진행된다면, 민주주의적이면서도 사회주의적인 혁명과 혁명이후가 도래할까요? 그들의 혁명이론대로 진행되더라도 결국은 혁명과 혁명정부는 레닌과 러시아 혁명정부와 마찬가지로 反민주주의적(권위주의적)인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로자 룩셈부르크.

마르크스와 로자는 레닌주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마르크스나 로자와 같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사회주의에서는 계급과 소유의 불평등에 따른 직․간접적인 차별과 위계 등이 사라지기에, 한 시민이 오직 한 시민으로서만이 대우받게 되어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진정한 혹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지배라는 과도기적 과정을 거쳐야만 이룩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 지배의 핵심 내용으로 ‘독재적’ 통치와 ‘전제적’ 침해를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에게는 이러한 독재적 통치는 소수인 부르주아지 독재(현실의 민주주의를 포함)가 아니라 절대 다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진정한 민주주의)이기에 정당화되고, 전제적 침해는 불평등과 착취의 종식을 위한 것이기에 정당화 됩니다.

마르크스가 위와 같이 독재, 전제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러나 사회주의를 향한 과도적 통치는 ‘권위주의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도 그 중 한 이유입니다. 절대 다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와 사회주의라는 정의를 위해서는 소수의 반대되는 이해와 의견은 강권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군가는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 등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구성과 운영원리로 자치․대리적 대표․소환 제도 등을 제시하고 있고,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민주성을 담보한다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마르크스의 이러한 시도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중 하나인 ‘다수의 원칙’과 ‘대표와 책임의 원칙’을 확대 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이러한 다수의 원칙과 대표․책임의 원칙의 철저한 준수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지속과 발전을 위해서는 다른 계급이나 계층, 소수자의 이해관계들이 용인되고 서로 다른 의견, 사회적 지향이 자유롭고 공정하게 경쟁할 있는 공적 공간이 충분히 제공되고 허용되어야만 합니다. 서로 다른 이해와 의견에 대한 자유와 관용의 정신, 그리고 그것을 구현하는 자유주의적 정치제도들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계급적인 것이든 진정한 것이든 민주주의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혁명기의 ‘독재적 지배’와 ‘전제적 침해’가 의미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 전제에 대한 ‘배제’입니다. 서로 다른 이해에 대한 자유와 관용이 없고,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되고 오직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만이 진리라는 이유로 유일한 지향으로 강제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다수에 의한 독재’이거나 ‘공산당에 의한 독재’일 뿐입니다. 민주적인 마르크스주의와 이상으로부터 反민주적인 레닌주의와 러시아적 실패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것입니다.

최용현  choiyh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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